리슨 케어풀리


이동휘





1. 깊이 있는 소리


몇 주 전, 한 사운드 파일을 듣게 되었다. 일로 연락을 나누게 된 한 패션 디자이너님이 필드 레코딩을 하는 자신의 친구가 녹음한 빙하 소리라며 보내 준 파일이었다. wav 형식의 이 파일의 지속 시간은 21분 53초였다. 파일 제목으로 미루어 보아, ‘모테라치 글래처’라는 장소에서 벌어지는 삭마(ablation, 풍화나 침식 작용에 의해 얼음이 깎이는 현상) 지점의 소리고, 녹음한 사람의 이름은 루트비히 베르거인 것 같았다. 어느 주말에 집 탁자에 앉아서 이 파일을 애플 뮤직으로 재생한 뒤 유선 이어폰으로 들었다. 구글 맵에 검색을 해 보니 모테라치 글래처는 스위스에 있는 빙하 지역이었고, 사진이 몇 장 뜨길래 사운드를 듣는 동안 살펴보았다.


우선 나는 이 사운드의 존재 방식이 희한하게 느껴졌다. 스트리밍 서비스에 뜨지 않는 사운드를, 그것도 이메일로 받아서 들어 보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이 아니라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이 사운드 파일을 듣는 행위가 인터넷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재생 수나 좋아요, 플레이리스트 따위와는 무관할 것이라는 게 한동안 신기했다.


그리고 소리. 몽환적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소리들–물 소리, 기포 소리, 얼음 소리–이 들려 왔다. 오래도록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파일을 보내 준 분도 하루를 마감할 때 머리를 식히기 위해 듣는다고 했는데 이해가 갔다. 루트비히 베르거의 이 사운드에서 나는 숨 쉬며 들썩이는 자연의 깊은 소리를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깊이’가 느껴지는 소리였다. 이 소리는 아주 정교한 손길로 조심스럽게 담아 낸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떤 숭고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 소리에 명상적인 가치까지도 부여하게 되었다. 나를 넘어서는 어떤 존재의 큰 힘이 내 안의 불안과 잡념 같은 것을 태워 없애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운드를 통해 나타나는 어떤 태도라는 게 있다면, 루트비히 베르거의 그것은 개별 인간보다 크고 오래된, 그러니까 초월적인 존재를 경건한 마음으로 맞이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생각되었다.


다이애나밴드와 임희주의 사운드게임 「모래들과 파도들」의 베타 버전을 처음 플레이해 보았을 때, 나는 내가 무언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건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 반가운 일이었다. 「모래들과 파도들」을 통해 내가 했던 것은 새로운 청취의 경험이기도 했고, 새로운 게임의 경험이기도 했다.(심지어는 시각적으로도 신선함을 느꼈다.) 그리고 「모래들과 파도들」의 사운드도, 어떻게 들으면, 모종의 ‘깊이’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 내가 만든 소리


1960년대 미국에서 도널드 저드, 로버트 모리스 등은 후에 ‘미니멀리즘’이라고 불리게 될 흐름을 열어젖혔다. 미니멀리즘 미술에서는 미술로부터 작품의 관계성, 작가의 의도, 초월성, 깊이 따위를 몰아내고자 했다. 이에 따라 둔중하고 단순한 형태를 띤, 회화도 조각도 아닌 산업적 구조물들을 미술관에 가져다 놓았다. 이 ‘작품’들 안에는 전체와 부분이랄 것이 없었다. 그로부터 관람객은 어떠한 깊이나 의도, 환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단일한 대상들이 있을 뿐이었다. 이제 작가가 작품을 내놓으면 관람자가 작품 어딘가에 놓여 있는 작가의 의도를 흡수한다는 전통적인 미술 관람의 구도가 사라졌다. 작품의 의미는 마침내 고정될 수 없는 무엇이 되었다. 오히려 작품은 그저 어떤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미니멀리즘 미술에서 대상은 그것이 놓여 있는 공간, 빛, 관람자의 시야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이었다.(1)


루트비히 베르거의 빙하 사운드가 장엄한 풍경화나 고즈넉한 종교화를 떠올리게 한다면, 「모래들과 파도들」은 나에게 미니멀리즘이 미술에서 일으킨 짓궂은 변화를 상기시킨다. 「모래들과 파도들」은 미니멀리즘 미술을 사운드 게임이라는 바탕 위로 옮겨 놓은 것 같다. 왜 그럴까? 「모래들과 파도들」은 매우 개인적인, 독립된 인디 게임이면서도, 제작자의 개인적인 손길 같은 것은 전혀 드러내고 있지 않다. 누가 어떤 연유에서 이런 것을 만들었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설명도, 이름도 없이 추상적인 공간과 사물만이 주어질 뿐이다. 말하자면 「모래들과 파도들」에는 아무런 ‘시그니처’나 정보가 없고, 그렇기에 눈앞의 ‘맵’을 넘어서는 깊이를 생각하게 하지도 않는다. 또 이 게임의 여러 맵에 등장하는 사물들–구, 원판, 기둥, 비탈, ‘알약’–은 복잡한 사물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오브제이다. 그것들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포함하지 않은,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그저 단일한 개체들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우리는 어떤 음악을 들을 때 그것의 제목과 가사를 기억하고, 그것의 멜로디를 기억하고, 그것의 리듬을 기억한다. 사운드 파일을 듣더라도 그것의 질감과 순서–가령 물이 떨어진 뒤 얼음이 깨진다는 등–를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모래들과 파도들」에서 사운드는 플레이어 개인에게 어떤 기억으로써 귀속되지 않는다. 혹은 기억과 관계 맺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어떤 시퀀스를 듣지만, 다시 듣지 않는다. 녹음을 해 놓지 않는 이상 다시 들을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여기서의 사운드는 플레이어에게 다소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모래들과 파도들」은 기억 가능한 사운드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 노이즈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노이즈를 기억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이 게임이 이런 무의미한 사운드를 만들어 내는 데 모종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모래들과 파도들」의 사운드는 아무 의미–깊이–가 없다. 오로지 내가 그 소리를 듣는다는 것만 알 수 있지, 그 소리를 어떻게든 의미화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모든 소리가 ‘무제’의 소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공간 속의 사물들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스스로 변화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사물들의 자체적인 변화는 거의 없거나 아주 단조롭다. 「모래들과 파도들」에서는, 마치 미니멀리즘 미술에서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대상의 외관이 변화하듯, 시각적 대상–오브제와 풍경–이 플레이어의 움직임에 따라서 변화한다. 그런데 변화하는 건 시각적 대상뿐만이 아니다. 중요한 건 청취 대상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미니멀리즘 미술에서 관람 대상의 외양이 공간과 빛을 통해 변화한다면, 「모래들과 파도들」에서는 청취 대상인 소리가 플레이어의 운동과 시간을 매개로 변화하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대상과 만나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모래들과 파도들」의 ‘덩어리’들의 음향적인 존재 방식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물론 「모래들과 파도들」에서 각 오브제가 내는 소리들은 각기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그 소리들도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루트비히 베르거의 빙하 사운드는 정밀하게 채집된 것이므로 그 원천이나 배경을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반면, 「모래들과 파도들」에서 우리가 듣게 되는 소리의 시퀀스–이를 ‘음악’이라고 하자–는 외부 세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음악을 아무리 들어도 외부로부터 그것의 원천이나 배경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래들과 파도들」의 음악은 그 너머 혹은 깊이를 지니고 있지 않고, 그렇기에 「모래들과 파도들」의 음악은 구상적이기보다 추상적이다. 그리고 이 추상적인 음악은 말하자면 플레이어가 그 자리에서 스스로 생산해 낸 사운드이다. 그러니까 이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감상 혹은 청취할 대상을 스스로 만들고 변화시키는 위치에 서게 된다.


3. 소리를 듣는 ‘일’


어떤 소리를 규칙적이고 일관되게 듣는다는 것, 달리 말해 특정한 소리의 시퀀스 혹은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언제나 그리고 당연히 가능한 일은 아니다. 예컨대 음악을 제대로 듣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재생되던 음악에 다른 소리가 끼어들 수도 있다. 음악을 재생하는 도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음악을 스스로 꺼야 할 때도 있다. 그러니 한 곡의 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소리' 혹은 노이즈의 개입 없이 듣는 일은 생각보다 드물 수도 있다. ‘노이즈캔슬링’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청취의 경험은–그 대상이 사운드든 음악이든–대부분 비일관적, 불규칙적, 불안정적이다.


다만 ‘깨끗한’ 청취가 드물고 귀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청취 경험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점은, 원래 소리를 듣는 일 자체가 일종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듣는 데에는 능동적인 행위가 필요하다. 무언가를 듣기 위해서는 예컨대 어디론가 가야 한다. 혹은 무언가와 접촉해야 한다. 혹은 저항을 이겨내야 한다. 주변 환경과의 이런저런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거리를 없애야 하고,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 소리를 듣는 ‘일’에는 신체와 정신이 소요된다. 즉,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시간, 위치와 방향 감각, 운동 에너지 등 모종의 자원을 소모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리 듣기는 ‘경제적’ 활동이다.


하지만 보통 청취 행위가 경제적이라는 건 인식하기 힘들다. 소리는 어디에나 있고 청취는 별 자원이 들지 않는 행위처럼 생각된다. 마치 OTT와 유튜브의 시대에 영상을 보는 게 쉽고 당연한 일처럼 생각되듯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취의 경제성을 관찰하려면 어떤 실험이 필요하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거나 랜덤한 소리만 들을 수 있는 곳, 특정 소리의 패턴과 질감을 듣기 위해서는 모종의 노력을 해야만 하는 곳에 처해 보아야 한다.


「모래들과 파도들」은 이러한 실험 환경을 제공하고 소리 듣기의 경제성을 실험할 수 있게 해 준다. 「모래들과 파도들」에서 관람자가 특정한 소리, 소리의 패턴, 소리의 텍스처를 듣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소리를 들을 수 없거나, 랜덤한 소리만 듣게 된다.


앞서 「모래들과 파도들」에서 감상자는 (미니멀리즘 미술에서와 같이) 감상 대상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는데, 이로써 감상자는 어떤 권한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거꾸로, 이 게임에서 감상자는 자신이 들을 소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감상자는 동시에 어떤 책임 혹은 일을 떠안게 되는 셈이기도 하다.


4. 형식과 충동


우리의 청취 생활을 생각해 보면, 그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자동 재생이라는 청취 방식이다. 옆으로 누운 세모 기호의 버튼만 클릭하면 무엇이든–스트리밍되는 음악이든, 사운드 파일이든, 유튜브 영상이든, 영화 파일이든–정해진 시퀀스가 균일한 속도로 플레이된다. 자동 재생은 오래된 약속이다.


「모래들과 파도들」은 말하자면 이 약속을 수동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게임을 플레이해 보면, 우리는 듣기가 어떤 절차를 거쳐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모래들과 파도들」은 듣기를 삼분할한다. 지향하기-이동하기-듣기가 바로 그 세 단계이다. 「모래들과 파도들」에서는 지향하고 이동해야 들을 수 있고, 지향하고 이동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 그리고 앞의 두 단계(지향하기와 이동하기)는 각각 오른손(마우스)과 왼손(방향키)의 운동에 그대로 대응한다. 말하자면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형식(form)이 바로 이 오른손과 왼손의 운동인 것이다. 이러한 ‘수동 재생’ 방식을 통해서 듣기는 수용적인 감각이 아닌 능동적인 행위가 된다.


또한 「모래들과 파도들」을 플레이할 때, 플레이어는 여기저기서 불규칙적으로 혹은 규칙적으로 들려 오는 노이즈를 어떤 ‘음악’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가지게 된다. 보통 생각하는 “너무 음악적인 음악”(임희주)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지속적이고 예측가능한 시퀀스로 만들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플레이어는 ‘연주’를 하고 싶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모래들과 파도들」은 음악의 감상자인 플레이어로 하여금 음악의 작성자(author)가 되어 볼 수 있도록 초대한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이제 자신에게 허용된 속도로 공간을 돌아다니며 환경을 ‘연주’하게 된다. 보통 우리가 듣는 음악은 어떤 순서가 정해져 있다. ‘도미솔 도미솔 라라라솔’이라는 시퀀스를 우리는 ‘무엇이 무엇이 똑같은가’라고 부른다. 시퀀스 자체는 정해져 있다. 이것은 사운드 파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소리가 들린 뒤 얼음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다르다. 정해진 시퀀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퀀스를 정해야 할 책임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재생해야 한다. 작곡가, 연주자, 청취자의 역할이 분리되어 있는 전통적인 음악 감상 방식과 다르게, 「모래들과 파도들」에서는 청취자가 곧 작곡가와 연주자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게 된다.


「모래들과 파도들」에서 들리는 소리에는 공백이 많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가 많다는 뜻이다. 아직 행성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서지 않았을 때, 터널 속을 이동하는 데 눈앞에 아무런 알약이 없을 때, 파도에 밀려서 소리를 내는 대상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우리는 아무 소리도 듣고 있지 않게 된다. (이 게임에서 캐릭터는 움직일 때 아무런 소리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무음’에는 어떤 긴장이 존재한다. 소리가 나지 않는 침묵의 순간조차도 플레이어가 플레이로부터 생산해 낼 ‘음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무음 또한 어떤 사운드적 시퀀스의 일부가 된다. 비슷하게, 「모래들과 파도들」에서 사운드는 캐릭터의 운동에 따라 변화한다. 이동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여전히 시간은 흘러간다. 내가 듣는 ‘음악’에는 이 ‘정지’도 기록되고 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모래들과 파도들」은 청취 행위의 조건이 되는 형식을 부각시킨다. 지향하기와 이동하기 외에도 무언가를 찾기, 기다리기, 저항을 이겨내기 등 청취의 조건은 다양하다. 이것은 이 게임이 자동 재생을 수동화하는 데 이용하는 게임의 형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래들과 파도들」은 주체에게 내재된 충동 즉 소리를 이어붙여 연주를 해 내고자 하는 충동을 드러낸다. 이로써 우리가 이 게임에서 하는, 침묵과 정지를 포함한 모든 활동들은 우리가 연주하는 사운드의 일부가 된다.


5. ‘디깅’ 그리고 ‘청취의 행위성’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 얼마 전 내가 블로그에 쓴 한 편의 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디깅’ 없이 문화를 ‘깊이’ 체험할 수는 없을까」라는 글인데, 여기서 나는 제목 그대로 디깅이라는 행위 없이 문화를 깊이 체험할 수는 없을지를 물었다.(2) ‘디깅’이란 “광산을 채굴하듯 한 분야에 깊게 파고드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데, 잘은 모르지만 이러한 용어가 맨 처음 유래한 것은 대중음악 분야이고, 현재는 다른 예술 장르 및 서브컬처 분야에로까지 퍼져 넓게 사용된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 좋은 것을 계속해서 찾고 즐길 때 ‘판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디깅이라는 행위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디깅이 일종의 지출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돈, 시간, 에너지를 사용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작품들을 ‘섭렵’하는 행위인 것이다. 나는 이런 행위가 조금 힘들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내가 지출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을 뿐더러 지출 행위 자체에 다소 회피적이기 때문에 나는 디깅이 부담스럽다. 그렇기에 디깅이 문화를 ‘잘’ 체험할 수 있는 어떤 전제 조건처럼 여겨지는 것에 조금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글에 쓰지는 않았는데, 디깅을 회의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디깅이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세계에 갇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디깅은 자신이 가진 취향에 점점 확고한 근거를 만들어 가는 행위이다. 취향을 넘어다니거나 취향을 부정하는 행위가 아닌 것이다. 내 주변의 ‘디거’들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어떤 세계에 대해 말하길 좋아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도 자신있게 주장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진짜’를 알고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자신감을 의심스럽게 보았다. 이것만 문화인이라고?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내 생각에 문화란 무언가를 ‘깊이 파고들어가야’지만 달성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사실 묻고 싶었던 것은, ‘깊이’를 달성해야만 ‘깊은’ 체험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조금 바꾸어 말해 보면, 감상자 또는 소비자로서의 깊이를 달성해야만 문화인으로서의 깊이를 달성할 수 있냐는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다이애나밴드와 임희주의 「모래들과 파도들」은 디깅의 대척점에 있다. 이들은 음악과 청취에 있어서 ‘더 많이, 더 다양하게’를 외치지 않는다. 그 대신 새로운 듣기를 제안하고 있다. 이들이 「모래들과 파도들」을 통해서 제안하는 것은 말하자면 천천히 또 자세히 듣기이다. 언제나 똑같이 느껴지는 듣기 행위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래들과 파도들」의 플레이 체험을 통해 나는 청취와 관련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행위성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가령 나는 이 게임에서 사운드의 규칙성이 무엇인지(맵1), 불규칙성이 무엇인지(맵6) 느껴볼 수 있었다. 다수성과 조화가 무엇인지(맵3), 단일성이 무엇인지(맵5) 느껴볼 수 있었다. 자유롭게 듣는 것이 무엇인지(맵4), 부자유와 저항 속에 듣는 것은 어떤지(맵2) 느껴볼 수 있었다. 이처럼 「모래들과 파도들」은 다양한 형태의 청취-행위성을 발굴하게 해 준다. 이렇게 형성된 ‘라이브러리’를 통해 우리는 듣기에 있어서 어떤 지평을 상상하고 스스로의 듣기 방식을 그 위에 위치지을 수 있게 된다. 감상자는 듣기라는 행위와 결부된 어떤 ‘입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청취의 문화에 참여한다는 것은 리스너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스너로서의 정체성은 보통 ‘무엇을 듣는가’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어떤 음악을 듣는지에 따라, 얼마나 새롭고 다양하고 희귀한 사운드를 듣는지에 따라 우리는 서로가 향유하는 청취 문화의 깊이를 가늠한다. 하지만 「모래들과 파도들」은 우리가 이미 리스너임을 자각시킨다. 그리고 청취와 관련하여 조금 다른 질문을 할 수 있게 우리를 안내한다. 그 질문이란 이런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듣는가? 당신은 어떤 듣기를 하고 있고,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가?


당신은 어떤 리스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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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 포스터 외, 『1900년 이후의 미술사』 3판, 배수희 외 옮김(서울: 사이언스북스, 2007), 568-569.

(2) https://blog.naver.com/mollumbo/223253045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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